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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항일투쟁의 발상지 전주(1) - 동학농민혁명

the-booja 2024. 12. 2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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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항일투쟁의 발상지 전주(1)

- 동학농민혁명

 

 

 

 

농민중심의 대규모 민중항쟁의 동학농민혁명

 

전주시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농민군은 이곳에서 정부와 협상을 통해 전주 화약을 체결했고, 이후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적인 개혁 활동을 펼쳤다.

 

전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승리와 개혁 요구가 실제로 이루어진 상징적 장소로, 그 과정에서 민중 저항과 사회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민중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TIP. 전주화약은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집강소 설치를 허락한 조정과 동학농민군이 맺은 협약이다.

 

 

 

[그림 1]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동학농민혁명의 정의와 의의

 

1894년 고부농민봉기에서 전주화약에 이르기까지의 봉건체제의 개혁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이다.

 

1892년 조선말의 조정은 고종의 무능과 왕비 민씨의 권력의 횡포, 국가 예산 낭비 그리고 민씨들의 횡포로 인해 부패가 만연했고 이러한 무능으로 외세의 침탈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각종 사회혼란으로 국민들은 매우 살기 힘든 시기였다. 특히 왕비 민씨(민비)의 가문인 민씨들은 민비의 관력을 이용해 공직을 돈을 받고 파는 매관매직에 열을 올렸다. 관직을 돈을 주고 산 관리들은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백성들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었다.

 

그런 어려운 시대에 경북 경주의 몰락한 양반 출신인 최제영은 백성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는 동학이라는 교리를 창시하였다.

 

동학의 사상모든 사람은 귀천이 없어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남녀를 차별하지 말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개혁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교리의 동학사상은 피지배 계층인 백성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어 고단한 백성들에게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조선말은 각종 부패로 전국에서 민란이 번지고 있었다. 특히 정읍의 고부군(현재 정읍시 이평면)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악랄한 횡포로 인해 그동안 쌓여 있던 농민들의 불만과 동학의 사상이 합쳐져 일반 민란이 아닌 동학사항을 견지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대형 농민 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동학군은 전라도를 관장하는 전라감영으로 진군하고 머물면서 재물만 취하고 끝나는 다른 민란과 달리 부조리한 제도와 신분제 등 개혁을 위해 조정과 타협하여 고치려 하는 등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맞서 싸운 의병의 역할까지 하여 그 의미가 더 크다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과 행정을 시민들이 직접 통치를 하였고 행정의 목표로 노비를 없애고,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게 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락하게 하는 남녀평등과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하는 등 상당히 민주적인 주장을 한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며 혁신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던 동학군은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쉽게 패한 아쉬운 마무리를 맺는다.

 

일본은 지금도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면서 신분제를 없애고 낡은 조선의 제도를 개혁하여 주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일본이 침략하기 전부터 동학농민혁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제적인 시대 흐름에 맞춰 아주 세련된 민주사상 등 개혁의 의지를 조선 스스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 일본의 주장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전주화약(全州和約)이란?

 

1894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부정부패에 맞서 봉기했으며, 조선 남부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도 개입하게 되면서 조선 내 상황이 복잡해졌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개입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부와의 협상을 선택했고, 그 결과 전주 화약이 체결되었다. 전주 화약(全州和約)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 농민군과 조선 정부 사이에 맺어진 휴전 협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화약의 결과로 농민군은 해산했고,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과 개혁을 약속했다. 또한, 농민들은 일부 지역에서 집강소를 통해 자치를 실현했다.

 

전주 화약은 동학농민혁명이 군사적 충돌에서 정치적 협상으로 나아간 중요한 사건이며, 이후 조선의 정치 및 사회 개혁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주 화약은 농민군과 정부 사이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이후 일본의 개입 명분으로 이어져 본격적인 일본의 간섭으로 이어졌다.

 

 

 

[그림2] 전주화약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이고 집강소 설치를 허락한 조정과 동학농민군이 맺은 협약

 

 

[그림 3] 집강소

개혁 사무를 담당했던 농민의 자치 기구(황토현 기념관)

 

 

 

민주주의와 항일투쟁의 발상지 전주에서 농민중심의 대규모 민중항쟁인 동학농민혁명에 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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